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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순혜뎐] 열일곱 김순혜 3 (← 되돌아가기) (← 이전 이야기) 다운이 순혜에게 안부를 물을 기회는 예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일주일 후에 있을 가을 운동회를 위해 오늘부터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그 뒷정리를 각 반의 반장들이 맡게 된 것이다. 다운은 반장은 아니지만 순혜가 반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얼른 자원해서 뒷정리를 하기로 했다. '이런 일은 체육부장이 하는 게 더 맞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하겠다' 하는 다운을 보며, 반장은 못 이기는 척 다운에게 줄다리기용 밧줄을 넘겨주었다. 다운은 순혜가 있는 쪽을 흘끗거렸다. 가을 운동회라고 해도 아직은 날이 더워서 그런지 순혜의 볼은 조금 발갛게 익어 있었다. 순혜는 머리를 위로 질끈 올려 묶은 상태였는데,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잔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 더보기
[순혜뎐] 3월 11일 (← 되돌아가기) "이 기사 올린 거, 저번에 왔던 그 기자 새끼야. 그 빌어먹을 사이트 내에서도 건덕지만 생기면 악착같이 물어서 악의적으로 편집한 찌라시만 올리는 놈이라니까. 기사 제목 자극적인 것 봐라. 아직까지는 청와대를 깎아내리고 있지만 곧 있으면 불똥이 이쪽으로 튀겠지. 무능한 경찰이라면서." (차 안, 형사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더니 불을 붙인다.) "형님 금연한다지 않았나?""세상이 내 금연을 방해하잖냐.""지랄, 핑계는. 이제 하루 지난 주제에.""하늘같은 선배한테 지랄이 뭐냐, 지랄이? 너, 인마. 나니까 봐주는거야. 다른 애들같았음 벌써 뒤통수 얻어터졌어.""누구? 형님하고 동기인데 벌써 팀장 딱지 단 그 분 말요?" (깐족거리며 담배를 무는 후배의 뒤통수를 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 더보기
[순혜뎐] 3월 9일 (← 되돌아가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오늘 낮 연속 추돌사고 처리로 한창 바쁜 때. 웬 여자 소방관 하나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신지? 이번 사고 때문이라면 딱히 소방서 측에 도움을 받을 일은 없습니다.""어? 강빛나?" (젊은 남경찰 하나가 아는 척을 하자 형사, 아는 사람이면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눈짓을 한다.) "시험 합격했다더니. 근무지는 이쪽으로 된거야?""어. 근데 무슨 일이야? 아까도 여기 근처에 불나서 난리던데.""거기 해결하고 바로 온 거야. 너, 순혜 없어진 거 알고 있었어?""순혜가 없어져? 걔가 왜?" (남경찰의 반응에 강빛나, 심란한 듯 마른 세수를 해댄다.)(남경찰, 강빛나의 표정을 살피고는 얼굴이 굳는다.) "요즘 이쪽 근처에서 이상하게 화.. 더보기
[순혜뎐] 열매반 김순혜 3 (← 되돌아가기)(← 이전 이야기) 오랜만에 등원한 아이들은 어쩐지 전보다 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다. 선생님은 손뼉을 치고는 아이들을 집중시켰다.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었으나 그건 그거고, 힘든 일은 별개였다. 겨우 2주 남짓한 여름방학 기간이 끝나고 다시 이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니 그는 벌써부터 어깨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자, 친구들. 다들 자리에 앉아봅시다.""네!""다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이 있죠?""네!""그래서 오늘은 스케치북에 '나의 꿈'에 대해 그려볼거예요." 스케치북 펼치고, 가져온 재료들로 어떤 꿈이든 멋지게 그려보는 거예요.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순혜도 열심히 자신은 어떤 .. 더보기
[순혜뎐] 열매반 김순혜 2 (← 되돌아가기)(← 이전 이야기) 짧은 여름방학이 끝났다. 등원할 생각에 아침 일찍 일어난 순혜는 방방 뛰어다니다 제 엄마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얌전히 다가와 수저를 놓기 시작했다. 눈이 붉은 것을 보니 어제도 순혜 엄마는 남동생 진혁 때문에 밤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순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반찬 그릇이며 국그릇이며 하는 것을 식탁에 가져다 놓았다. "순혜야, 뜨거우니까 국그릇은…….""우리 큰 딸 기특하네. 엄마 도와주는거야?" 어느새 말끔히 씻고 셔츠를 입은 아빠 철원이 말했다. 그리곤 자신의 아내에게 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뭐 도와줄 것 없어?""됐어요. 순혜가 다 했는데, 뭘.""진혁이는?""이제 잠들었죠.""우리 아들이 참 착해. 엄마 밥 할 때 귀찮게 안하고. 그렇지?" 그의 말에 순.. 더보기
[순혜뎐] 열매반 김순혜 1 (← 되돌아가기) 맴 - 맴 - 매미 소리가 귓전에서 울리고 타는 듯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계절. 모든 사람들이 더위에 지쳐 밖을 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한창 쌩쌩 뛰어노는 순혜에게 여름의 뜨거움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순혜야, 와서 아이스크림 먹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순혜가 달려갔다. 나무 그늘, 벤치 앞에 선 이는 빛나의 엄마인 미영이었다. 그가 순혜 얼굴에 난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우리 순혜 얼굴이 발갛게 익어버렸네. 안 힘들어? 오늘 날도 더운데, 그냥 들어갈까?" 안 힘들어요. 전 열매반이니까! 히히 웃는 순혜의 얼굴이 사과마냥 붉다. 그는 언젠가 열매의 뜻을 듣고는 이렇게 씩씩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일곱살 평생에 새싹반에서 열매반이 된 것은 그에게 크나큰 자랑거리.. 더보기
[순혜뎐] 열일곱 김순혜 2 (← 되돌아가기) (← 이전 이야기) 다음날, 다운은 체육관에서 순혜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순혜는 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밤 10시가 다 되도록 체육관에 있었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 이상해. 아무 이유 없이 체육관을 그만둘 애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운은 끝내 순혜를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순혜라는 아이에 대한 생각이 흐려질 때 즈음, 그를 다시 만난 곳은 뜻밖에도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였다. 쉬는 시간 10분 안에 매점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올 수 있는지 없는지 내기를 하고 마구 뛰어다니다가 학생 주임 선생님에게 걸려 주의를 받은 참이었다. “저 꼰대!” “조용히 좀 말해. 그러다 꼰대 듣겠다.” “너도 방금 꼰대라고 했잖아?” 자기 .. 더보기
[순혜뎐] 열일곱 김순혜 1 (← 되돌아가기) 이럴 리 없었다. 체육관 관장 딸인 그의 입장에선, 이런 패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래 남자 애들도 퍽퍽 때려눕힌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얼굴도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기지배한테 지다니! 머리 위로 마치 게임처럼 자막이 떠오른 기분이었다. 신다운 (Lv.100)님이 김순혜 (Lv.1)님에게 패배하였습니다. (...피식...) 피식…? 피식은 뭔데! 이잖아! 본분에 충실하라고! 그 아련한 ...은 또 뭔데! 왜 "패배"만 굵은 거야? 강조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 있어? 다운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이건 그에게 있어 너무나 굴욕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저 이겼다는 뿌듯함이나 성취감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표정이란. 기뻐하라고! 감히 날 이겼으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