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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순혜뎐] 열일곱 김순혜 3 (← 되돌아가기) (← 이전 이야기) 다운이 순혜에게 안부를 물을 기회는 예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일주일 후에 있을 가을 운동회를 위해 오늘부터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그 뒷정리를 각 반의 반장들이 맡게 된 것이다. 다운은 반장은 아니지만 순혜가 반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얼른 자원해서 뒷정리를 하기로 했다. '이런 일은 체육부장이 하는 게 더 맞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하겠다' 하는 다운을 보며, 반장은 못 이기는 척 다운에게 줄다리기용 밧줄을 넘겨주었다. 다운은 순혜가 있는 쪽을 흘끗거렸다. 가을 운동회라고 해도 아직은 날이 더워서 그런지 순혜의 볼은 조금 발갛게 익어 있었다. 순혜는 머리를 위로 질끈 올려 묶은 상태였는데,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잔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 더보기
[순혜뎐] 신사년, 2001 (대한민국-0) (← 되돌아가기)(← 이전 이야기) 맴 - 맴 - 매미 소리가 귓전에서 울리고 타는 듯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계절. 검은 색 파일을 든 이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수십년이 지났건만, 그의 모습은 처음 대한민국에 발을 들인 때와 다름이 없었다.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신사는 이 날씨에도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소매에 달린 커프스 단추 가격만 수백만원은 가뿐히 넘길 것 같은 차림새의 그는 이런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누가 봤더라면 혹시 이 구역을 재개발하러 온 갑부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행이라 해야할지, 딱히 밖을 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아파트 단지를 느긋하게 걸었다. "그 아이의 기억 속 장소나 음양陰陽과 천기天氣의 조화를 보았을 때 금일 이 시각이 .. 더보기
[순혜뎐] 병진년, 1976 (대한민국-0.5) (← 되돌아가기)(← 이전 이야기) 병진년 유월. 그는 여전히 조선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찾고자 하는 그 제대로 된 정보도 얻지 못한 까닭이다. 읽었던 기억을 떠올려 "그"가 기해년의 사람이란 사실까진 알아내곤 무턱대고 시간을 뛰어넘었으나, 이 곳이 "그"가 사는 나라가 맞는지도 확신이 없기에 다시 시간을 뛰어넘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 아이의 기억을 제대로 읽어볼 것을." 안타깝게도 그의 기억 속에서 결정적인 단서는 지워져버린 상태였다. 기껏해야 내가 있던 (----)년이랑 같은 기해년이라는 것 밖엔 모르잖아. 그의 귓가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올해는 하필 병진년이라니. 꼴사납다. 붉은 용의 해가 아닌가. 괜히 기분이 나빠진 그가 땅.. 더보기
[순혜뎐] 404 Not Found (← 이전 이야기) (다음 이야기 →) (스토리텔러 : 도민주, 양예진)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더보기
[순혜뎐] 돌아온 김순혜 (← 이전 이야기)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해외동포 여러분. 100년 전 오늘, 만세 운동의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선생과 학생, 여성과 남성, 피 끓는 청춘과 백발의 노인들까지...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그들의 만세소리는 전국으로 뻗어나갔고,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그들의 의지를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월치고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는 청와대 행사장. 청명한 하늘 아래 모인 사람들은 단상에 선 이의 말에 몰입해갔다. 검은 정장을 입은 순혜는 연설 중인 무대 아래, 관객석 근처에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상 없습니다.”“계속 확인해.” 동료로부터 무전을 받은 순혜의 미간이 계속 8자(八)를 그리고 있자 옆에 서 있던 후배가 사근사근 웃으며 다.. 더보기
[순혜뎐] 3월 1일 (← 이전 이야기) 굿모닝- 빠빠빠빠빠빠빠빠빠↗ 굿 모 -! "빌어처먹을 좋은 아침이다, 알람 진짜……! 바꿔주면 안될까?" 순혜의 알람을 대신 끈 지혜가 이를 꽉 깨물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새벽 알바를 끝내고 개강 전 휴일을 만끽하려던 지혜였으나 잠든지 한시간도 안 되어 울린 알림에 울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순혜는 슬쩍 시간을 확인하고는 망설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제 침대 앞에 서있는 지혜의 콧등을 톡 때렸다. "넌 어차피 월요일에 기숙사 들어가잖아.""언니는 엄마랑 언제 화해할건데?""화해는 무슨 화해…….""모르는 척 하지마. 언니는 엄마랑 싸우면 티 엄청 나거든?" 내가 언제? 순혜가 지혜의 시선을 피하자 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순혜는 욕실에 들어가 치약 뚜껑을 열었다. 치약을 꾹 .. 더보기
[순혜뎐] 3월 11일 (← 되돌아가기) "이 기사 올린 거, 저번에 왔던 그 기자 새끼야. 그 빌어먹을 사이트 내에서도 건덕지만 생기면 악착같이 물어서 악의적으로 편집한 찌라시만 올리는 놈이라니까. 기사 제목 자극적인 것 봐라. 아직까지는 청와대를 깎아내리고 있지만 곧 있으면 불똥이 이쪽으로 튀겠지. 무능한 경찰이라면서." (차 안, 형사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더니 불을 붙인다.) "형님 금연한다지 않았나?""세상이 내 금연을 방해하잖냐.""지랄, 핑계는. 이제 하루 지난 주제에.""하늘같은 선배한테 지랄이 뭐냐, 지랄이? 너, 인마. 나니까 봐주는거야. 다른 애들같았음 벌써 뒤통수 얻어터졌어.""누구? 형님하고 동기인데 벌써 팀장 딱지 단 그 분 말요?" (깐족거리며 담배를 무는 후배의 뒤통수를 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 더보기
[순혜뎐] 3월 9일 (← 되돌아가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오늘 낮 연속 추돌사고 처리로 한창 바쁜 때. 웬 여자 소방관 하나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신지? 이번 사고 때문이라면 딱히 소방서 측에 도움을 받을 일은 없습니다.""어? 강빛나?" (젊은 남경찰 하나가 아는 척을 하자 형사, 아는 사람이면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눈짓을 한다.) "시험 합격했다더니. 근무지는 이쪽으로 된거야?""어. 근데 무슨 일이야? 아까도 여기 근처에 불나서 난리던데.""거기 해결하고 바로 온 거야. 너, 순혜 없어진 거 알고 있었어?""순혜가 없어져? 걔가 왜?" (남경찰의 반응에 강빛나, 심란한 듯 마른 세수를 해댄다.)(남경찰, 강빛나의 표정을 살피고는 얼굴이 굳는다.) "요즘 이쪽 근처에서 이상하게 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