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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순혜뎐] 열일곱 김순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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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이 순혜에게 안부를 물을 기회는 예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일주일 후에 있을 가을 운동회를 위해 오늘부터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그 뒷정리를 각 반의 반장들이 맡게 된 것이다. 다운은 반장은 아니지만 순혜가 반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얼른 자원해서 뒷정리를 하기로 했다. '이런 일은 체육부장이 하는 게 더 맞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하겠다' 하는 다운을 보며, 반장은 못 이기는 척 다운에게 줄다리기용 밧줄을 넘겨주었다.

다운은 순혜가 있는 쪽을 흘끗거렸다. 가을 운동회라고 해도 아직은 날이 더워서 그런지 순혜의 볼은 조금 발갛게 익어 있었다. 순혜는 머리를 위로 질끈 올려 묶은 상태였는데,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잔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은 다운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기야, 샌드백을 치거나 하며 땀을 흘릴 때는 있어도 다운과 체육관에서 몇번을 겨룰 적엔 지친 기색 하나 없던 순혜이지 않은가.

 

거기에 반장이라고? 다 가졌네, 다 가졌어.

 

열일곱이란 그런 나이였다. 잘난 또래를 보면 시기심과 질투심이 샘솟는 나이. 다운은 괜히 순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다운은 교무실 앞에서 본 순혜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물어보자. 말할 거리는 많지.

체육관 왜 안 나오냐고. 또……, 체육관 왜 안 나오냐고.

젠장! 할 말이 이것밖에 없네.

 

다운은 손에 쥐었던 밧줄을 운동장 바닥에 내팽개치고 순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이러언 데서 다 만나아네. 너어 우우리 학교였구나아?"

 

다운의 말투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국어 시간에 다같이 글을 읽는 수준이었다. 그의 얼굴이 홧홧이 달아올랐다. 이래서야 무슨 꿍꿍이가 있냐고 몰아붙이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열일곱살 짜리가 생각하는 꿍꿍이라봐야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느냐마는, 다운의 입장에서는 나름 며칠은 고심해서 쥐어짜낸 얘깃거리들이었다. 다운이 느끼기에 순혜는, 다짜고짜 '너, 내 친구해라!'라고 말하면 친절하고 상냥하게 거절할 것만 같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

 

저 짧은 대답 뒤에 '너는 몰랐니?'하는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민망해진 다운은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는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너, 체육관 앞으로 못 나오면 환불해줄까?"

 

아니, 이 말이 갑자기 왜 튀어나와? 

 

다운은 손을 들어 제 입을 찰싹 때리고 싶었다. 가끔 체육관 회원들에게 하던 말버릇이 그대로 나와버리고 만 것이다. 

 

환불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우리 체육관에 다니게 하고 싶은데.

 

"너도 내가 체육관에 안 나가길 바라는 거야?"

"어엉?"

 

순혜는 쏘아붙이는 말투로 꼭 상처받은 사람 같은 말을 했다. 당황한 다운의 입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순혜는 평생에 화를 처음 내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하다가 심하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다운은 순혜의 뒤통수를 보다가 땀에 젖은 머리를 긁적였다.

 

"쟤는 무슨, 심하게 말하는 게 뭔지 모르나?"

 

 

(다음 이야기 →)

 

 

 

(스토리텔러 : 도민주, 양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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