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

[순혜뎐] 열일곱 김순혜 1

(← 되돌아가기)

 

 

 

이럴 리 없었다. 체육관 관장 딸인 그의 입장에선, 이런 패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래 남자 애들도 퍽퍽 때려눕힌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얼굴도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기지배한테 지다니! 머리 위로 마치 게임처럼 자막이 떠오른 기분이었다.

 


<SYSTEM> 신다운 (Lv.100)님이 김순혜 (Lv.1)님에게 패배하였습니다.


<SYSTEM> (...피식...)

 

피식…? 피식은 뭔데<시스템>이잖아! 본분에 충실하라고! 그 아련한 ...은 또 뭔데! 

왜 "패배"만 굵은 거야? 강조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 있어? 

 

다운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이건 그에게 있어 너무나 굴욕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저 이겼다는 뿌듯함이나 성취감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표정이란. 기뻐하라고! 감히 날 이겼으면 좋아하는 티라도 내란 말이다! 그러나 순혜는 그저 최소한의 예의만 갖출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운은 어쩐지 울컥해서는 순혜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말했다.

 

"한 번 더 해!"

 

그의 말에 순혜는 딱히 불쾌해하는 느낌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운이 만약 차분히 이성을 유지한 상태였더라면 순간 순혜의 얼굴에 떠오른 희열에 찬 은근한 미소를 보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상대의 표정 따윌 살필 겨를은 없었다. 그는 지금, 이번에는 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가득한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9번째쯤 순혜가 다운을 쓰러뜨렸을 때, 순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또 할거야?"

 

'또'라니! 그 말이 다운의 심기를 건드렸다. 계속 해봐야 어차피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여유로운 태도. 다운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 힘든 기색도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순혜의 표정에 다운은 빠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는 도저히 다시 겨루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됐어. 그만하자."

"그럼 난 간다."

"어, 어?"

 

링에서 내려가 뒤도 돌아보지 않는 순혜를 보던 다운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야, 너 나한테 이,이래놓고 그냥 가는 거야?"

"내가 뭘 어쨌는데?"

"아니, 어쨌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미안한데 나 통금있어. 열한시까지라 얼른 가봐야 하는데."

"아, 그래. 잘 가."

 

그렇다고 저렇게 쌩하니 가버리냐? 

제대로 된 인사도 못했는데.

고백도 하기 전에 차인 것 같은 기분은 뭐야. 나만 이상해졌잖아.

 

순혜가 가고 다운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순혜는 매일 같은 시간에 체육관에 와서 9시 반이 되면 칼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다운이 겨루자고 말하면 마다하지 않았다. 다운이 생각하기에 순혜는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별종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유전자 체계가 다른지도 몰랐다. 생명과학 시간에 한창 DNA와 관련된 것을 배우고 있었으므로 ― 물론 다운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드물었으나 ― 다운는 순혜가 자신과는 다른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다운은 오랜만에 책상 앞으로 가서는 다이어리 한 권을 꺼냈다. 마지막 작성 날짜가 1월 7일에 머물러있는 아주 깨끗하고 깜찍한 다이어리였다. 그는 몇 줄 끄적이지 않은 쪽을 과감히 뜯어내고는 펜을 들었다.

 

"어디보자. 김순혜. 나이는 … 십칠. 성별 … 女"

 

그리고는 다이어리에 순혜와 관련된 것들을 적어나갔다.

 



 체육관 친구 김순혜에 관한 진지한 고찰 


 · 이름 : 김순혜
 · 나이 : 17
 · 성별 : 女
 

○○월 ☆☆일 


체육관에 순혜라는 애가 온지 8일 째. 아무리 생각해도 얘는  다른 애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생긴 건 문학 소녀처럼 생겨선 첫 날부터 날 이기질 않나. 자존심 상하지만 그 애와 수십번을 겨뤘어도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말수도 적고. 아니 말 수가 적다기보단, 나랑 말하기 싫은건가? 생각 할 수록 열 받네! 야,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은건 아니거든!
 
 

 

다운은 씩씩거리며 펜을 내려놓았다. 신다운, 너 안 나오면 치킨 내가 다 먹는다! 거실에서 들려온 외침에 다운이 방에서 뛰쳐나갔다. 기다려! 닭다리 하나 내 거야!

 

 

 

(다음 이야기 →)

 

 

 

(스토리텔러 : 도민주, 양예진)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혜뎐] 열매반 김순혜 1  (0) 2019.05.17
[순혜뎐] 열일곱 김순혜 2  (0) 2019.05.16
[순혜뎐] 3월 5일  (0) 2019.05.06
[순혜뎐] 金順惠 因緣 第一. (김순혜 인연 제1.)  (0) 2019.05.06
[순혜뎐] 행방불명  (0) 2019.05.06